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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 행사 지난 행사
(2019) 산문/대학.일반부 대상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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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촌
  • 2021-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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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집시

 

  -유영채(한국외국어대)

 

새처럼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건아로 태어났다. 서울의 모 병원 산부인과에서 두 손을 꽉 쥐고 태어났을 때, 아마 내 손에는 유복한 핏줄이 들려있었던 것 같다. 갓 태어난 애가 유별나게 손을 꽉 쥐고 있어서, 의사와 간호사들이 손을 펴려고 끙끙댔다고 그랬으니까. 젖도 먹어본 적 없는 애가 젖 먹던 힘을 다해 손을 쥐었다고, 집에서는 그 때부터 독한 게 눈에 보였다고 했다. 제 것을 하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양, 그 이기적인 아귀 힘을 엄마는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마치 세뇌시키듯이.

처음 한글을 뗐을 때, 엄마의 눈빛은 ‘기쁨’과 ‘환희’였던 것 같다. 그건 비단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였다. 곧바로 영어를 익혔다. 일본어도, 중국어도, 러시아어도, 스페인어도 익혔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집어삼켰다. 세 살즈음 되었을 때 6개 국어로 책을 읽었다. 그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세간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여기저기 불려가기 시작했다. 엄마의 눈빛도 한층 빛났다. 날 낳고 초라하게 죽어가던 서른 초반의 여자는 없었다.

엄마는 날 위해서, 라는 명목 하에 온갖 영재원으로 날 들이밀었다. 여기저기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에도 신청했다. 콧물이나 질질 흘리던 세 살에 처음 양복을 입어봤다. 각이 잘 선 흰색 셔츠, 검은 멜빵바지, 도수도 없는 안경. 나는 꼬마 척척박사처럼 보였다. 엄마는 내가 똑부러지게 보여야 한다고 했다.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보이던 눈빛은 광기였다. 어딘가 미친 사람 같았다. 그 때는 그게 뭔지 몰랐다. 그냥 날 위해서라니까, 새 옷을 입는다니까 좋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날 위한 일이라고. 나는 네 엄마니 얕잡아 보일 수 없다며 제 옷도 같이 사들였다. 루이까또즈 지갑에, 프라다 백에, 샤넬 자켓에 구찌 구두에 온갖 명품은 몸에 다 둘렀다. 엄마 아빠와의 마찰은 점점 심해졌다. 그럴 만도 했다. 우리 집은 평범했고, 어린 나에게 들어오는 출연료는 턱없이 부족했으며 내 학원비는 너무 많이 나갔다. 거기에 출연한답시고 새 옷을 무지막지하게 들였으니 돈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조용히 내 방에 들어왔다. 내가 잠이 들었건, 들지 않았건 조용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게 좋았다. 내 재능이 아니라 날 사랑해 주는 것 같았다. 그 때만은 집안이 조용했다. 개미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는 조용하게 내 귓가에 속삭였다. 다 엄마가, 널 사랑해서 그러는거야. 알지, 우리 아기?

 

그러나 대다수 어린 천재들의 말로가 그러하듯이, 내 결말은 썩 좋지 않았다. 천재라는 기대감을 여린 어깨에 모두 지고 나는 추락했다. 그래, 사실 추락이라 할 것도 없었다. 사실 진창에 줄곧 처박힌 상태였으니까.

프로그램에 출연한 덕분에 후원자를 찾았다. 엄마는 더 기세등등하게 아빠에게 따졌다. 이게 다 재능을 알아본 내 덕분이야. 당신은 뭘 했어? 내가 얠 뒷바라지 하는 동안 뭘 했냐고! 알겠으면 앞으로는 조용히 돈이나 벌어와. 그게 엄마가 아빠와 했던 마지막 대화였다. 아빠는 그 뒤로 집안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 아마 이혼을 하겠다고 결심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가만히 우는 것 뿐이었다. 아쉽게도 언어는 금방 뗐는데 수학에는 젬병이었다. 후원자는 내 초등학교 성적이 들쭉날쭉하자 후원을 취소했다. 겨우겨우 지방에 있는 외고로 진학했다. 죽어라고 공부했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한 뒤로 나를 더 들들 볶았다. 집과는 멀어서 기숙사에 들어갔다. 밤 10시는 나에게 있어서 공포였다. 10시, 모든 기숙사생들이 핸드폰을 돌려받는 시간에 엄마는 전화했다. 공부해야지, 그렇게 하면 못 따라가! 수천만원씩 들여서 공부하는 애들이 한 둘인 줄 아니? 시험만 잘 치면, 성적만 좋으면, 대학에 잘 들어가면! 그건 내 19년 인생을 옥죄는 삶의 낙인이요 발목의 추같은 존재였다. 어릴 때 뗐던 6개 국어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나마 나중에 뗀 것이 스페인어라 스페인어과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텔레비전에 출연했던 기억만이 어렴풋이 남았을 뿐, 지식으로서 뭔가가 남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드라마 속 배우들이 징글맞은 학력 피라미드를 쳐다보는 장면이 나왔다. 엄마는 감명 받은 것 같았다. 저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했다. 저렇게 공부해야 이상적인 직장과 이상적인 노후를 누릴 수 있다고 했다. 거지같은 이상이었다. 그 ‘이상’에 나는 없었다. 엄마는 이제 빚까지 내서 내 학비를 대고 있었다. 명품은 팔아넘긴지 오래였다. 이제 맹목적으로 나만 바라봤다. 힘들다고 전화 한 통이라도 하는 날엔 잔소리섞인 푸념만 되돌아왔다. 이런 게 이상적인 노후를 위한 현실이라면, 이걸 원망하는 나는 지독한 염세주의자임에 틀림없었다.

수능에서 13문제를 틀렸다. 스카이는 고사하고 상위권 대학의 하위 과에나 겨우 붙을 성적이었다. 엄마는 뒤집어졌다. 될 대로 되라, 사실 그 정도만 해도 나에게는 감지덕지였다.

지겨웠다. 수능 말미에 나는 공부하지 않았다. 엄마의 푸념은 짧은 응대로, 전화는 수능이 가까워 바쁘다는 핑계로 돌렸다. 그렇게 수능을 쳤으니 최상위권 대학은 당연히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서울로 올라갈 준비를 하는 나에게 엄마는 닦달을 했다. 어떻게든 수석을 차지해야해. 내가 어떻게 널 키웠는데 그런 대학에 들어가니? 이건 날 배반한거야. 날 배신한거야. 내 인생은! 도대체 거기서 엄마의 인생론이 왜 나온단 말인가. 나는 엄마의 장기말이 아니었다. 당연히 배팅용 칩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수석을 차지해야 된다니, 더 이상은 싫었다.

뒤늦은 사춘기라면 사춘기였다. 연애도 하고 싶었고, 동아리도 들어가서 제대로 된 친구도 사귀고 싶었다. 더 이상은 천재라는 가짜 굴레에 억압받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나를 위한 타이틀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문자가 날아왔다. 신입생들은 오리엔테이션이 있으니 참여하라는 공지였다.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여러 동아리가 저를 소개할 겸 공연한다고 했다. 팜플렛엔 뭐가 그리도 적을 게 많은지 빽빽하게 소개글과 사진들이 범벅이었다. 밴드부도 좋았고, 풍물패도 좋았고, 연극부도 좋았다. 사실 공부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면 뭐든 좋았다. 공연이 시작했다.

둥!

가슴을 울린 북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그건 어떻게 보면 내 안의 자유를 일깨운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무거운 소리라니. 고개를 들었다. 저렇게 무거워 보이는 악기를 들고도 북을 치는 사람은 새처럼 가벼워 보였다. 마치 북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어떻게 저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있지? 북이 무겁지 않나? 저렇게 매달려 있는게 안 무거울 수가 있다고? 그럴 리 없었다. 북은 소리만큼이나 무거운 악기였다.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들었던 북은 천근만근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심장을 울리는 무거운 소리에 홀린 듯이 그 사람만을 쳐다봤다. 날듯이 뛰어 내 앞에서 앉는 그 자유로움에 반했다.

풍물패에 들어갔다. 운동이라고는 펜대 잡는 손풀기 운동이 다였으니 북을 들고 사방을 뛰어다니자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공부보다는 북 치기에 열중했으니 성적도 무너졌다. 집에서는 계속해서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간간히 잘 지낸다는 문자만 남겼다. 알바와 풍물패, 그 두 가지가 스무 살 일상의 전부였다. 알바비로 용돈과 기숙사비를 충당했다. 하루에 두 탕, 세 탕씩 아르바이트를 뛰었고 모처럼 쉬는 날엔 기숙사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으니 엄마는 날 보려 서울에 찾아올 때마다 허탕을 칠 수 밖에 없었다. 기숙사는 집이 아니었고, 나는 어딘가의 안 보다는 바깥에 있을 때가 더 많았으므로 사실상 집을 나와 떠도는 집시처럼 살았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내가 패장이 되었다. 미친 듯이 북만 쳤다. 둥둥, 그 소리는 심장을 울렸고 영혼을 두들기는 소리였다. 그 소리만 들으면 이혼한 부모님도, 날 얽매던 목소리도, 엄마가 두 눈을 마주치며 속삭일 때마다 방망이질 치던 심장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그득하게 마음을 메우는 북소리만이 전부였다.

공연날이 되었다. 그 날만은 엄마에게도 공연 초대장을 보냈다. 오래 전에 이혼하고 집을 나간 아빠에게도 가급적이면 초대장을 전해달라고 언급했다. 엄마는 왔지만 아빠는 오지 않았다. 수척해보였다. 늙어가던 서른 초반의 여자는 그대로 늙었었던 것 같다. 다만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엄마는 북을 들고 서있는 나를 배신감 어린 눈으로 봤다. 생소하다는 눈빛이었던 것도 같다. 광기보다는 걱정이 보였다. 그렇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집시들의 수장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패장의 인삿말을 위해 단상 위로 올랐다.

 

“새처럼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었습니다.”

 

목이 메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장내가 고요했다. 꼭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영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틀어진 그날처럼. 엄마는 여전히 생소한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펜대가 아닌 북을 들고 선 이런 ‘내’가 생소하다는 얼굴이었다.

 

“지금 제가 하는 인삿말은, 제 짧은 삶에 대한 건방진 회고입니다.”

 

지금 들고 있는 북은 내가 그간 져왔던 억압의 무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다, 오히려 더 무거웠다. 저 눈빛조차 내가 감내해야 했기에.

 

“벅찬 삶이었습니다. 나름의 명문대에 들어와서, 나름의 재미를 봤습니다. 제가 북치배가 되어 느낀 점은, 제가 아무래도 평범한 삶을 살기에는 그른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엄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상관없었다. 집시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묶여있는 존재가 아니다.

 

“역마살이라도 끼었는지, 지독하게 많이 떠돌아야 살이 풀리려나 봅니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번엔 내 눈이었다. 나는 집시였다. 아마도 그럴 것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이건 내가 한 선택이었고, 처음으로 내 의지대로 누군가의 앞에서 뱉는 말이었다.

 

“풍물패는 조선의 집시였겠지요. 제가 옛날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집시로 살았겠지요. 가장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서 가장 천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제의 역순으로 자유로웠으니까, 저는 이 순간만큼은 가장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울면서 던진 농담에 장내가 다소 소란스러워졌다. 피식피식 웃는 관객들이 보였다. 후련했다. 엄마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아직 난 공연을 시작조차 안했는데.

 

“서론이 길었습니다. 공연이 곧 시작될 예정입니다. 저는 풍물패 패장 ‘가람’입니다.”

 

가람은 내가 지은 패명이었다. 집시로 다시 태어났으니 새 이름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흐르는 강물처럼 매인 곳 없이 살고자 지은 이름이었다. 공연이 시작됐다.

 

둥!

 

북을 치며 날아올랐다. 가죽의 울림에 모든 상념이, 과거가, 추가, 족쇄가 떨어져 나갔다. 관객석 맨 앞, 눈물을 흘리던 누군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그 순간, 나는 조선의 집시였다.

 

새처럼 자유로운 영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