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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 행사 지난 행사
(2019) 운문/대학.일반부 대상 작품
  • 김유정기억하기
  • 문학촌
  • 2021-01-28
  • 조회수 149

네가 봄이런가

 

-이찬영(서울 종로구)

 

안, 우리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나서

나는 지구에서 제일 따듯한 곳으로 떠나고 싶었어

 

세계지도를 장만했지

지도의 생김새는 각국마다 다르다는 걸 알았다

서로가 가운데 있었으니까

 

우리는 도시 외곽의 허름한 모텔에서 하루를 보낸 적 있다

그날이 이별여행이 될 줄도 모르고

 

안녕

안녕

 

*

 

아침부터 고속버스에 올랐지 각자 예매한 자리에 앉아 바깥을 보고 있었는데, 바라보면 무덤이 있었고, 그 무덤에는 누가 묻혀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무덤 위로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

잡초를 핥고 있는 뜨거운 햇살

우리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선 이내 잠에 들었다

 

어떤 꿈을 꿨던 것 같은데

 

*

 

우치동물원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펠리컨 앞에 서 있었어 한과 연이는 내 뒤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지 너와 펠리컨이 닮았어 누가 우리에 갇혀 있는지 모를 정도야 우리는 한참 웃었다 웃다 보면 노을이 가라앉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울려 퍼지는 새 울음소리

 

펠리컨을 곧잘 따라했지 날개를 일제히 펼치는 자세를 펠리컨의 울음소리를 우리에 갇혀 있는 펠리컨의 모습을

 

폐장할 때까지 우리는

거기에 있었다

 

*

 

그날 밤, 허름한 모텔 방을 잡았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자부해서 할 말이 없었는데, 창밖으로 들리는 개구리 울음소리 멀찍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우리 유년시절을 이야기하자. 각자 학대를 당했던 자신의 유년시절을 고백했다. 모두 자기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내 아빠는 죽었어. 우리 엄마는 집에서 도망갔어. 정말? 정말 바람피우는 걸 직접 보기도 했어

 

벽지를 뜯었지

뜯을수록 벗겨지는 속마음이 있으니깐

 

우리는 가정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걸까

가정의 가운데에서 멀어져

본 것들은

무덤, 우리에 갇힌 펠리컨, 서로의 얼굴들

 

유년시절을 무슨 자랑처럼 말하고 있었는데

 

안, 그래서 너는 유년시절을 봄으로 정의하자고 했잖아

 

웃으면서 말할 수 있으면 따듯한 거라고

우리의 유년시절은 너무나 비슷해서 서로가 될 수도 있는데

 

박수쳤어 울고 싶지 않아서 박수만 쳤어

 

내 유년시절을 따듯하다고

말할 수 있구나

 

감탄사를 내뱉으면서

 

안녕

안녕

 

먼지 낀 창가 위로 그믐이 가라앉고 있었다

따듯하게 살자는 말만 하염없이 하다가

우리는 헤어졌다

 

각자의 가정으로 흩어져

다시는 서로를 생각하지 않기로 해요

 

*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무덤이 연속적으로 보인다

 

눈 감으면

그날 꿨던 꿈이 생각나는 것 같기도 하고

*

 

페인트 통을 엎지르고 부르는 모순적인 봄

 

*

 

갈기갈기 찢은 세계지도가 흩어져 있다

 

방 안으로 반쪽짜리 햇빛이 든다

서늘하게

지구 가운데에 있는 그 5평짜리 허름한 모텔1)

 

우리가 함께 있던 그곳이 봄이런가,

 

 

 

 

 

 


1)2017년. 우리는 “제 24회 김유정 기억하기 전국문예작품공모”를 준비하고 있었다. 몇 명은 입상하기도 했다. 이날 이후로 우리는 각자의 환경으로 인해 만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