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문학촌

2016 김유정문학캠프 백일장 대상(산문)

[산문부문 대상] 새 안양예술고등학교 고 은 비 언젠가 본 다큐멘터리에는 사마귀에게 먹히는 새가 있었다. 특별히 길거나 큰 부리도, 강한 날갯깃도 없는 벌새였다. 포식자들은 물론이고 피식자들에게마저 먹잇감이 되는 벌새는, 크기마저 아주 작았다. 벌새가 가진 생존 비결은 빨리 나는 것뿐이라고 했다. 벌새는 살아남기 위해 1초에 70번 가량 날갯짓을 한다. 쉴 새 없이 날갯짓을 하면서, 벌새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멀어질 수 있는 것이다. 찜통 같은 더위였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과 들린 시내에는 화장품 가게들의 연달은 세일로 나레이터 모델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가게 밖으로 내놓은 스피커에서는 요즘 인기 있는 걸그룹의 노래가 나왔다. 곧 너댓 명의 나레이터 모델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길쭉길쭉한 다리의 모델들 사이에서 유난히 작은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언니였다. 가수의 꿈을 꾸던 사람답게 키는 작아도 동작들이 정확했다. 열심히 춤을 추던 언니가 세일 품목을 읊기 시작했을 때,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슬쩍 눈인사만 하고는 각자 하던 일을 계속 했다. 언니를 알아본 친구 몇몇이 나를 불렀지만, 모른 척 했다. 언니가 나레이터 모델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걸 모르는 동네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이런 곳에서까지 그걸 확인해 주고 싶지는 않았고, 그건 언니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언니가 빠르게 말하는 ‘파운데이션 30%, 립제품 20% 할인’이라는 문구를 들으며 나는 시내를 빠져나왔다.언니는 초등학교 때부터 항상 앞자리를 독차지 해왔다. 매년 반에서 가장 작은 학생이었던 언니의 별명은 땅콩, 미 니 미, 쥐똥 등 죄다 키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런 언니가 하필 나레이터 모델 아르바이트를 선택한 건 보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1년 365일 야외에서 하는 아르바이트인 만큼 일당이 제법 괜찮기도 했지만 등록금조차 마련하기 힘들었던 언니의 꿈이 댄스가수였기 때문이다. 원 없이 춤이라도 춰 보자는 게 언니의 생각이었지만 아르바이트는 언니의 생각만큼 즐겁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는 더운 날 더웠고 추운 날 추웠다. 배꼽티에 핫팬츠를 입고 통굽 구두를 신은 채 춤을 추면 발목이 퉁퉁 부어올랐고, 온종일 멘트를 해야하는 탓에 밤만 되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며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었다.벌새는 꿀처럼 당분이 있는 고열량의 먹이를 먹는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만큼의 열량을 보충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언니 역시 일이 끝나는 순간부터 입에 뭔가를 꼭 십으며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서도 버스로 이십 분이 넘는 거리동안 먹은 것들이 무색해질 만큼 언니는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댔다. 예전엔 밥 한 그릇을 먹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던 언니의 식습관도 완전히 바뀌었다. 음식을 십는다기보다는 우겨 넣는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 굶은 사람처럼 식탁 위의 음식들을 먹어치우며 언니는 이번에 바뀐 점장의 욕을 했다.“완전 진상이야. 매출이 안 나오면 식대도 안 주겠대. 말이 되니?”폭염주의보가 내린 날에도 언니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땡볕 아래서 바깥에 서 있을 언니가 걱정돼 물을 가지고 가게 앞으로 갔다. 옷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길이의 바지와 티셔츠도 더위를 삭히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언니의 티셔츠는 땀으로 완전히 젖어 있었고, 머리가 땀 범벅인 얼굴에 죄다 달라붙어 있었다. 새로 바뀌었다는 점장이 내 얼굴까지 알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아 세일 품목을 줄줄 읊고 있는 언니의 옆에 얼음물 한 통과 손수건을 놔뒀다. 언니는 빨개진 얼굴을 내가 건넨 손수건으로 벅벅 문질러 닦았다. 먼저 집에 가 있으라는 말을 듣고 새 물통을 언니 손에 들려준 뒤 집으로 돌아왔다. 몇 시간 후 집으로 온 언니는 아까보다 더 빨개진 얼굴로 씩씩거렸다.“아니, 매출이 안 나오는 게 왜 내 탓이야? 이 더위에 나다니는 사람 자체가 없는 걸 왜 나한테 떠넘겨? 오늘 매출이 안 나왔다고 그걸 내 월급에서 깎겠대. 그게 무슨 논리야.”한참 동안 얼음을 이빨로 십으며 점장까지 십어대던 언니는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아까부터 나오던 TV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TV속에는 아이돌 가수들이 나와서 춤을 추고 있었다.“그거 알아? 새들은 깃털을 빼고 보면 몸 구조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똑같대. 닭이나 참새나 크기 빼고는 다 비슷하게 생겼다는 거야. 내가 만약 새였다면, 쟤네들하고 입은 깃털 빼고는 다 똑같았겠지?”언니의 얼굴은 더위 때문에 빨간 건지, 눈물 때문에 빨간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나는 문득, 얼마 전 봤던 벌새가 떠올랐다. 어쩌면 언니도 벌새처럼 살아남기 위해 이렇게 열심히 날갯짓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따라, 퉁퉁 부은 언니의 발이 유난히 안쓰러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