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산문/고등부 대상 작품 및 수상소감
[김유정 기억하기 전국문예작품공모 수상작] 산문/ 고등부 대상 김유림 <부산 부흥고> 슬픈 이야기여기 온 이유가 당신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간혹 가다 그럴 때가 있잖아요? 징그럽게 하기 싫은 일을 갑자기 해야 한다고 느낄 때. 그게 다예요. 오해라도 할까 먼저 말해두는 거예요. 서운하게 생각하지도 마세요. 설령 그렇다고 한들 당신이 꺼림칙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까.그쪽은 내 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테고, 가지고 있다 한들 오래된 것이었을 테니, 나를 잘 봐둬요. 내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까. 오늘 후로 영영 보지 못할 지도 몰라요. 물론 어느 날 당신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 수도 있겠지만, 그건 분명히 먼 훗날일 거예요.보다시피 나는 아주 까매요. 치렁치렁한 레이스가 우습게 보였고, 치마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던 데다, 고개를 까닥거리면서 노래를 부르기보다는 또래 남자애들을 쥐어 패며 놀았거든요. 키는 멀대 같이 크고 보기 싫을 만큼 빼빼 말랐어요. 편식하지는 않아요. 미더덕 빼고 싫어하는 건 없으니까. 미더덕은 딱 하고 터질 때 역겨운 맛이 나잖아요. 그래서 싫은 거예요. 아무튼 가리는 게 없으니, 뼈다귀 같은 몰골은 더러운 성격 때문이겠죠. 보다시피 까다롭고 예민하고, 짖어대기 좋아해요.그런 표정으로 울지 않는 게 신기하네요. 그러지 말고 나를 봐요. 아주 까맣고, 빼빼 마르고, 젠장맞을 성격 때문에 머리도 길게 기르지 못해요. 당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어요. 실망했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나는 그쪽이 아주 희고 눈이 큼지막했으면 했어요. 키가 작고 통통하기를 바랐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면, 그리고 머리를 가슴까지 길러 연필로 쪽 지어 다녔다면 더 좋았겠죠. 소녀처럼 깔깔거리며 웃고. 맞아요, 당신이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남인 것처럼 닮지 않았다면, 희미한 연결고리라도 느끼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을 거예요.내가 울지 않고, 그렇다고 예의상 슬퍼하는 표정을 바르지도 않고, 도리어 당신을 노려보고 있으니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네요.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난 엄마가 그쪽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아예 없는 사람처럼 여기며 살아왔을 텐데.얼마 전에, 그래요, 그 일이 있던 날, 엄마가 시꺼먼 블라우스를 입은 채로 성경을 읽고 있었어요. (엄마가 종교가 있다는 말은 아니에요. 성경은 그 날 사온 새것이었으니까요. 내 말은, 그게 다 당신 때문이었다는 거예요.) 참고로 말해두지만, 엄마는 질퍽질퍽한 내 성격을 받아줄 만큼 너그럽고 괴상한 사람이에요. 지금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당신과 달리. 당신은 어쩜 웃지도 않네요. 드라마에서는 쥐어짜서라도 웃어 보이던데. 어쨌든 내가 하려던 말은 엄마가 느닷없이 당신에 대해 말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 하고 말이에요.그런데 그거 알아요? 그 뜬금없고 무덤덤한 말이 실은 속을 후벼 팔 만큼 예리하게 느껴졌다는 걸요. 나는 당신이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흙속에 파묻고 꽝꽝 얼리며 살아왔어요. 그런데 그 말이 얼은 땅을 깨부수고 당신이라는 사람을 끄집어 낸 거예요. 그게 얼마나 아팠을지 감이 들어요? 그러니 그 때 내가 울었던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엄마는 조금도 경건하지 않은 동작으로 성경을 치우더니 내게 물었어요. `아픈 거니, 슬픈 거니?'끅끅거리면서 `아픈 거예요.' 하고 대답하자 엄마가, 나처럼 가는 눈이 아니라 크고 둥그스름한 눈을 가진 엄마가, 가만히 나를 올려다봤어요. 차라리 엄마가 가는 눈이었다면 덜 아팠을 텐데. 어쩔 수 없다는 건 나도 알아요. 엄마 눈을 가늘게 좁힐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눈에 박음질을 할 수도 없으니까. 그냥, 그랬다는 거예요.내가 진정할 기미가 없자, 엄마가 달래는 투로 말했어요. `넌 내 딸이야.' 아픈 표정 짓지 말아요. 그게 사실이니까. 그냥 내 말만 들어요. 그러면 돼요. 어차피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잖아요?그 말에 이어, 엄마가 구깃구깃한 쪽지를 내 손에 쥐어주며 `그렇지만 아픈 게 아니라 슬펐으면 해.', 하고 말했어요. 당신도 그 쪽지를 봤어야 했는데.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먹기라도 한 것처럼 자글자글하게 주름이 잡힌 그 쪽지를요. 귀퉁이가 다 닳아 뭉툭해져 있었고, 땀이 축축하게 배어있었어요. 엄마는 당신의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 몇천 번을 연습했을 거예요. 내게 쪽지를 쥐어주는 엄마의 얼굴은 당신의 것보다 훨씬 많은 감정들로 얼룩져 있었고, 입술이 잇자국으로 너덜너덜했어요. 우리 엄만 그런 사람이에요.그래서 난 학교까지 빠지면서 당신을 만나러 이곳으로 온 거예요. 엄마 때문에요. 오직 엄마 때문에 난 이렇게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고작 잿더미가 되어버린 당신을 이렇게 만나러 왔다고요.이렇게 떨렁 사진 한 장, 그것도 울 것 같은 얼굴만 남긴 거예요? 난 아무것도 몰라요. 당신이 어떤 버릇이 있는지, 어떤 성격인지, 하물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를 어떻게 버렸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어버렸는지도 알지 못해요.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당신이 죽었다는 것과 당신이 나를 낳은 사람이라는 게 다예요.한 시간이 넘도록 납골당이라는 단어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서성거렸어요. 무수히 많은 나날 동안 어떻게 만날지 상상하고, 찌를 말들을 속으로 날카롭게 벼려왔는데, 당신이 이렇게 재로밖에 남아있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요? 내가 벼려온 말들을 내뱉지 못해서, 내 속만 너덜너덜해지고 있어요.그러니 살지 그랬어요? 저도 몰랐던 병을 앓았을 수도 있고, 차에 치였을 수도 있고, 음식을 잘못 먹었을 수도 있고, 불이 난 곳에 우연찮게 있었을 수도 있고, 높은 곳에서 발을 헛디뎠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사는 게 지긋지긋해서 목숨을 내버렸을 수도 있죠. 알아요, 확률까지 배운 마당에 살아있는 게 신기할 만큼 많은 죽음이 있다는 걸 알고, 당신이 죽었다는 사실이 그다지 놀라운 게 아니라는 것도요. 그렇지만 살았으면 했어요. 적어도 살아서 내가 당신을 미워하든, 혹은 용서하든 그 모든 게 서로 마주보며 이뤄지기를 바랐어요.아뇨, 됐어요, 다 필요 없어요. 난 고작 열일곱 살이에요. 그쪽 나이 반도 안 된다고요. 그러니 난 지금 울 수 있어요. 희망 같은 걸 가지라는 말은 아니에요. 만약 당신이 희망 비슷한 것이라도 갖는다면 난 정말 당신 따라 죽어버릴 거니까. 내 말은 슬프지 않다는 거예요.분명히 말하건대 슬프지 않아요. 그렇지만 타인이, 제 3자가 우리를 본다면 안타깝게 여기겠죠. 슬픈 이야기라도 생각하겠죠. 그게 황당해서, 그리고 내가 그 사이에 끼어있다는 사실이짜증 나서······....괜찮아요. 진정했어요. 가끔씩 복받쳐 울 때가 있잖아요. 도대체 뭐가 복받쳐 오는 지 알 수 없지만. 그냥 일방적으로 지껄이는 이 대화가 지긋지긋해서 그래요. 꼭 미친년처럼 보일 테니까.그런데 있잖아요, 그거 알아요? 당신을 어떻게 만날지 수없이 떠올려 봤다고 했잖아요? 그 때마다 늘 똑같은 부분이 내 발목을 잡고 늘어졌어요. 웃길 거예요. 하지 않을 거라고 되뇌면서도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거든요. 상상 속의 난 당신을 처음 만날 때,엄마라고 불렀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불렀어요. 아마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슬픈 이야기라고 매듭짓고 말겠죠. 그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쪽 잿더미를 앞에 두고서라도 불러보고 싶었어요. 엄마, 하고.그게 우리 진짜 엄마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다시는 당신을 그런 말로 부르지 않을 테니까요. 부를 수 없을 테니까요. 이상하죠, 난 그게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아요.정말 돌아버리기 전에 갈게요. 잘 있어요. 어쩌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당신을 보고 싶어 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지금에서야 그게 다 뭔가 싶지만. 그 국화꽃이 오랫동안 시들지 않기를 바랄게요. 그런데 마지막이거나 그 비슷한 것일 테니, 가기 전에 한 번만 더 불러 봐도 되죠?엄마······. 하고 말이에요. [수상소감] “읽기 쉬운 글 쓸 수 있길 바라”산문 고등부 김유림 수업시간에 울린 요란한 문자메시지 알림음에 가슴 졸이는 한편, 또 스팸메일이구나 하고 짜증을 냈다.그러다 야자 시간 전쯤에야 보게 된 문자 한 통.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교실을 펄쩍펄쩍 뛰어다녔다.“야, 나 대상이래!”그 후로 친구들과 가족들이 법석을 떨어줬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은 얼떨떨해하는 것으로 충분했다.물론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도 내 몫이었지만. (김유정 작가님에게든 심사위원님들에게든, 친구들이든, 가족들이든, 아니면 내가 글을 쓸 수 있도록 해준 수많은 책이든.)아무쪼록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쉬운 글을 쓸 수 있기를, 진지한 글과 지루한 글을 헷갈리지 않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