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이 살았던 농촌에서는 일본의 식민통치 초기부터 1910년 [토지조사사업]과 1920년 [산미증식계획]의 명목으로 침략전쟁의 뒷바라지와
차질 없는 식량공급을 강요해왔다.
1920년 경제공항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일본은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등으로 침략전쟁을 확대시켜 한국
을 더욱 강압적으로 약탈하고 상품시장으로 만들었다.당시의 농촌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지주와 마름, 그리고 소작농민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번이 마름이란 욕 잘하고 사람 잘치고 그리고 생김생기길 호박개 같애야 쓰는거지만 장인님은 외양이 똑됐다. 작인이 닭마리라 좀 보내지 않는
다든가 애벌논때 품을 좀 안 준다든가 하면 그해 가을에는 영낙없이 땅이 뚝뚝 떨어진다. 그러면 미리부터 돈도 먹이고 술도 먹이고 안달재신으
로 돌아치든 놈이 그 땅을 슬쩍 돌아안느다. 이 바람에 장인님집 외양간에는 눈깔 커다란 황소 한놈이 절로 엉금엉금 기여들고 동리사람은 그
욕을 다 먹어가면서도 그래도 굽신굽신 하는게 아닌가 ” -봄봄 중에서, 김유정 전집. 1987-
소설 '봄‥봄'에는 읍내 사는 배참봉댁 마름인 봉필영감이 등장한다. 그리고 '봄·봄'과 '동백꽃' 이 외에 작품에서도 마름과 소작인의 관계가 드러난다. 지주는 토지 소유자로
농지가 없는 소작농민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심복이라 할 수 있는 마름을 시켜 소작 농민을 감독하고, 소작료를 징수했다. 그런 과정에서 마름은 소작농민을 노예처럼 함부로
다루었고, 지주와는 별개로 수탈을 하기도 했다. 당시 지주는 수리조합비·비료대 등의 각종 부담까지 소작농민에게 전가하여 80%의 소작료를 수탈하였다. 소작료 이외에
노력봉사·경조사 비용 등 각종 명목을 소작농민에게 부담시켰다. 소작농민은 지주에게 신분적,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노예나 다름없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 빈농 약 29만 9천명
이 토지를 상실하고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관념적 피상적 농촌소설과 달리 김유정은 실감나는 농촌소설을 썼다. 그것은 체험과 관계가 깊다. 그는 서민적인 것을 좋아했다. 또 소박하면서도 황소고집이었다. 그것은 산골
에서 직접 살며 농촌 분위기를 가까이 접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유정 시대의 가난한 농촌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